여정

조회 수 8575 추천 수 0 2016.08.08 19:32:38



짙어져가는 초록. 생명력이 넘치는 곧게 자란 풀들과 나무들. 

씨끄럽게 우는 매미소리와 물이 있는 곳에서 마음껏 소리를 치며 노는 아이들.

이 계절은 아마도 자라나기 위해 필요한 양분의 공급이 어느때보다 강렬해서 이렇게 뜨거운 게 아닌가 싶다. 

그 양분을 머금고 가을을 누리고 겨울을 이겨내는 힘이 될테고 우리는 한참뒤엔 그 뜨거운 공급의 시간이 

먼나라 뉴스 끝자락처럼 대수롭지 않은 지난 일이 될 것이다. 


우리 모두는 씨앗이었다. 

우리가 씨앗을 봤을때 거기서 뭐가 나오고 무엇이 될 것이라는 건 판매처 포장지에 대충 적혀있지만 

손바닥 위에 후 불면 날아갈듯 조그만 씨앗들을 진실되게 들여다 본다고 해서 그 후의 일들이 보이진 않는다. 

모든 씨앗은 양분을 공급받아 스스로 쪼개져서 뿌리를 내리고 땅을 뚫고 올라온다고 초등학교때 실험을 통해서 경험했을 뿐,

땅 아래서의 일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우리는 지나가는 흙을 보며 그런 숭고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. 

그러나 우리 모두는 씨앗이었고 그래도 이 사실을 오랜시간 대대로 무의식중에 새겨졌기 때문에 무성한 숲에 감동하고 

거대한 생명의 힘 앞에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. 


먼저 쪼개져야 한다는 것. 

씨앗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씨앗일 뿐 다음 스텝을 시작할 수 조차 없다.


우리는 어느때보다 뜨거운 여름 아래서 묵묵히 사막을 걷고 있다. 

이 시간은 그 어느때보다 길고 힘겨우며 너무 길어지기에 끝이 있는건가 가끔 믿을 수 없을 정도로.

무서우리만큼 고요해서 지지자들 조차 고요해진 가운데 폭풍을 견뎠고 비바람을 통과하며 때론 불평하며 물을 달라 소리치기도 하고

과연 이 길의 끝이 있는건가 답이 없는 질문을 쏟아내기도 하면서.


우리는 작아졌고 힘을 잃었으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목마름은 깊어져 갔다.

그러나 나는 위안을 얻는다. 우리가 작아졌다는 것에. 내 스스로의 힘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. 


우리는 모두 자라난다. 아마도 죽을때까지. 


스스로 자랄 수 있는건 이세상에서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. 

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성장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고 내가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 

나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늘 나의 기준을 두고 판단하며 나를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. 왜냐하면 앞으로도 이 길을 스스로 가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.

우리는 지금 이것을 내려놓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. 


우리에게 덧입혀진 포장지를 벗고 좀 더 진실된 무언가, 그게 설령 세상이 보기엔 더 소박하고 보잘것 없고 아무것도 아닌 지나칠 법한

사소한 것일지라도 몇몇 사람은 그 앞에 멈춰서고 생각할 수 있는, 씨앗이 쪼개져 나온 생명. 그 헐벗은 생명이 되기 위해. 


여정. 모든것은 여정이며 삶 안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. 

고되고 힘들수록 어쩌면 더욱 가치 있기에 그 고통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우리는 박수를 보내는 게 아닐까.

지금 이 순간, 앞을 알 수 없는 이 시간에 나는 감사한다. 꽃은 반드시 필 것이기에.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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